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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니치 필사본(Voynich Manuscript), 600년 가까이 아무도 읽지 못한 세계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책

by 밀크럽려니 2026. 8. 21.

세상에는 아직도 인간이 읽지 못하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오늘은 보이니치 필사본(Voynich Manuscript), 600년 가까이 아무도 읽지 못한 세계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책에 대해서 다시 알아 볼 예정입니다. 고대 유적에서 발견된 비문이나 점토판 가운데 어떤 것은 문자의 형태는 분명하지만 어떤 언어를 기록했는지 알 수 없어 지금까지 해독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난히 독특한 문서가 하나 있습니다. 몇 줄짜리 비문이나 작은 점토판이 아닙니다. 무려 수백 페이지에 걸쳐 정체불명의 문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한 권의 책입니다. 페이지를 넘기면 처음 보는 식물들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넘기면 별과 태양, 달을 연상시키는 천문학적 그림과 복잡한 원형 도표가 나타납니다. 또 다른 페이지에서는 사람처럼 보이는 인물들이 녹색 액체가 담긴 욕조나 관처럼 생긴 구조물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옆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혀 있습니다. 더욱 이상한 점은 이 글이 누군가 무작위로 기호를 적어놓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어처럼 보이는 문자 묶음이 있고 특정 기호가 반복되며, 어떤 기호들은 일정한 위치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마치 실제 언어가 가지고 있는 문법이나 철자 규칙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 내용을 확실하게 읽어낸 사람은 없습니다. 이 책이 바로 보이니치 필사본(Voynich Manuscript)입니다. '보이니치'라는 이름은 이 책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1912년 이 필사본을 입수해 세상에 널리 알린 고서적상 윌프리드 보이니치(Wilfrid Voynich)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책 자체는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필사본에 사용된 양피지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는 재료가 대략 15세기 초반에 만들어졌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적어도 책의 물리적인 재료만 놓고 보면 현대에 누군가 만들어낸 단순한 장난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현재 보이니치 필사본은 미국 예일대학교의 베이네키 희귀도서·필사본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언어학자와 암호학자, 역사학자, 수학자, 컴퓨터 과학자들이 이 문서를 분석했습니다. 현대에는 통계학과 컴퓨터 알고리즘, 인공지능까지 동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결정적인 해독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는 도대체 무엇이 적혀 있는 것일까요? 중세 시대의 의학서일까요? 약초의 효능을 기록한 식물도감일까요? 별의 움직임을 기록한 천문학 또는 점성술 책일까요?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지식을 암호화한 비밀 문서일까요? 아니면 애초에 아무 의미도 없는 글자를 이용해 만든 거대한 가짜 책일까요? 보이니치 필사본의 미스터리는 단순히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누가 만들었으며, 왜 만들었고, 어떤 사람이 읽기 위해 만들었으며, 왜 그 문자를 이해하는 방법까지 완전히 사라졌는가? 한 권의 책이 거의 60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건너 우리 앞에 도착했지만, 정작 책이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셈입니다.

보이니치 필사본(Voynich Manuscript), 600년 가까이 아무도 읽지 못한 세계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책
보이니치 필사본(Voynich Manuscript), 600년 가까이 아무도 읽지 못한 세계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책

존재하지 않는 식물과 별자리, 보이니치 필사본에는 무엇이 그려져 있을까?

보이니치 필사본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궁금해하는 것은 "이 책은 어디에서 발견되었을까?"라는 점입니다. 현대에 이 필사본을 유명하게 만든 인물은 윌프리드 보이니치였습니다. 그는 1912년 이탈리아에서 고문서들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이 특이한 필사본을 입수했습니다. 이후 책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여러 학자에게 사본을 보내면서 보이니치 필사본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책의 과거를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필사본과 관련된 역사적 기록 가운데 중요한 단서로 거론되는 것이 17세기에 작성된 편지입니다. 당시 이 책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알려진 요하네스 마르쿠스 마르치가 예수회 학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에게 필사본을 보내며 해독을 부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사람들도 이미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즉, 보이니치가 이 책을 발견하기 수백 년 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서였던 셈입니다. 한때 이 필사본이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도사였던 로저 베이컨(Roger Bacon)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양피지의 연대가 15세기 초반으로 분석되면서 13세기에 활동했던 로저 베이컨이 직접 작성했다는 가설은 설득력을 잃었습니다. 과학적인 연대 측정은 몇몇 가설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정작 저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책 자체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요? 보이니치 필사본의 현존 부분은 200장이 넘는 양피지 잎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 페이지는 접혀 있어 펼치면 더 큰 그림이 나타납니다. 연구자들은 책의 제본 흔적 등을 바탕으로 원래 존재했던 일부 페이지가 사라졌을 가능성도 생각합니다. 내용은 삽화의 성격에 따라 여러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식물과 관련된 그림입니다. 페이지마다 커다란 식물 한두 개가 등장하고 주변에는 정체불명의 글이 적혀 있습니다. 처음 보면 중세 시대의 약초학 책과 비슷합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약초의 특징과 효능을 그림과 함께 기록한 책들이 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보이니치 필사본 역시 약용식물을 설명하는 책이라는 가설이 자연스럽게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그림 속 식물을 정확히 식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식물은 잎이 실제 식물과 비슷하지만 뿌리 모양이 전혀 다릅니다. 다른 그림은 여러 식물의 특징을 하나로 합쳐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상상의 식물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중세 시대의 식물 그림은 현대의 과학적인 식물도감처럼 정확한 비율과 형태로 그려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식물을 장인이 단순화하거나 과장해서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식물 부분을 지나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태양과 달, 별을 연상시키는 그림과 복잡한 원형 도표가 등장합니다. 황도십이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그림도 있기 때문에 천문학 또는 점성술과 관련된 부분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중세 시대에는 천문학과 점성술, 의학이 지금처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건강과 별자리의 움직임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약초와 별자리, 인체에 관한 내용이 한 책에 함께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가장 기묘한 부분이 나타납니다. 작은 사람 형상의 인물들이 물이나 녹색 액체처럼 보이는 곳에 들어가 있고, 그 주변에는 관이나 파이프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구조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를 목욕 치료와 관련된 그림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인체 내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성의 건강이나 생식, 치료법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가설도 제기되었습니다. 또 다른 페이지에서는 약병처럼 보이는 용기와 식물의 일부가 함께 등장합니다. 그래서 약재를 만들거나 보관하는 방법을 설명한 약학 관련 부분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 그림이 줄어들고 짧은 문장처럼 보이는 글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일부 문단 앞에는 별이나 꽃처럼 생긴 표시가 붙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요리책이나 의학서의 처방전처럼 짧은 지침들을 모아놓은 부분이 아닐까 추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림을 근거로 한 추측입니다. 문자를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연구자들은 이상한 딜레마에 빠집니다. 그림을 이해하려면 글을 읽어야 하고, 글을 해독하려면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보이니치 필사본을 둘러싼 첫 번째 거대한 장벽입니다.

세계의 암호학자들이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보이니치 문자는 왜 읽을 수 없을까?

보이니치 필사본이 세상에 알려지자 암호학자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암호문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필사본에는 수많은 문자 기호가 존재하고 이들은 단어처럼 일정한 묶음을 형성합니다. 연구자들은 이 정체불명의 문자 체계를 편의상 '보이니치어(Voynichese)'라고 부릅니다. 물론 보이니치어라는 이름이 실제로 하나의 언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필사본의 문자 체계를 편리하게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문자들이 완전히 무작위로 배열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특정 단어 형태가 반복되고 비슷한 형태의 단어들이 서로 가까운 곳에 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기호는 단어의 앞부분에서 많이 등장하고 다른 기호는 끝부분에서 자주 나타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런 특징은 실제 자연언어에서도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도 특정 조사는 단어 뒤에 붙고, 영어에서도 특정 문자 조합이 다른 조합보다 자주 나타납니다. 따라서 보이니치 문자가 단순히 아무 기호나 무작위로 적어놓은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암호 해독 방법을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여기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암호를 해독하려면 보통 원래 어떤 언어로 작성되었는지에 대한 단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영어 문장을 단순 치환 암호로 바꿨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영어에서는 E나 T처럼 자주 등장하는 문자가 있습니다. 암호문에서 특정 기호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면 해당 기호가 자주 사용되는 알파벳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니치 필사본에서는 어떤 언어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지조차 모릅니다. 라틴어인지, 이탈리아어 계열인지, 독일어 계열인지, 혹은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언어인지 알 수 없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기호 하나가 문자 하나를 의미한다는 보장조차 없습니다. 하나의 기호가 하나의 음절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기호가 합쳐져 하나의 소리를 나타낼 수도 있고 특정 기호가 발음이 아니라 문법적인 기능을 담당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심지어 필사본 자체가 암호문이 아니라 완전히 독자적인 문자 체계로 기록된 언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암호 해독이 아니라 미지의 언어를 해독하는 문제가 됩니다.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생각해 보면 이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로제타석이었습니다. 같은 내용이 서로 다른 문자 체계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자들이 비교하면서 해독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선형문자 B 역시 반복되는 문자 패턴과 지명 등 여러 단서를 분석한 끝에 결국 해독되었습니다. 하지만 보이니치 필사본에는 아직 로제타석과 같은 결정적인 비교 자료가 없습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떤 지역에서 작성했는지도 확실하지 않으며 사용된 언어도 알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암호를 풀기 위한 열쇠 자체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많은 해독 주장이 등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라틴어라고 주장했고, 다른 사람들은 히브리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와의 관련성을 주장했습니다. 인공언어나 특수한 약어 체계일 가능성도 계속 제기되었습니다. 현대에는 컴퓨터와 인공지능까지 동원되고 있습니다. 컴퓨터는 인간보다 훨씬 빠르게 수많은 단어의 빈도와 반복 패턴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문자 사이의 관계를 계산하고 다른 언어의 통계적인 구조와 비교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AI라고 해서 자동으로 답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컴퓨터에게도 학습하고 비교할 정답 데이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니치 필사본에는 확실하게 확인된 번역문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알고리즘이 특정 언어와 비슷하다는 결과를 내놓더라도 그것만으로 실제 번역이라고 증명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해독으로 인정받으려면 몇 개의 단어나 문장을 그럴듯하게 번역하는 수준을 넘어야 합니다. 같은 규칙을 적용했을 때 책 전체 또는 상당 부분을 일관되고 재현 가능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내용이 그림이나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검증의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등장한 '보이니치 필사본 해독 성공' 주장 가운데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결정적인 해독은 아직 없습니다.

의학서인가 암호인가 거대한 장난인가, 보이니치 필사본의 정체를 둘러싼 가설

보이니치 필사본이 풀리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수많은 가설이 등장했습니다. 그중 비교적 현실적인 설명은 중세 시대의 의학 또는 약초학 관련 전문서적이라는 가설입니다. 식물 그림이 매우 많고 약재를 담는 용기처럼 보이는 삽화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약초를 이용한 치료법은 중요한 의학 지식이었습니다. 만약 보이니치 필사본이 특정 지역의 약초와 제조법, 복용법 등을 기록한 책이라면 식물 그림과 짧은 문장들이 함께 존재하는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여성 건강과 관련된 의학서라는 가설입니다. 액체 속에 들어가 있는 인물과 관처럼 연결된 구조를 목욕 치료나 생식기관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림만으로 내용을 확정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천문학 또는 점성술과 관련된 책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필사본에는 별자리와 천체를 연상시키는 도표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현대인에게 약초와 점성술은 전혀 다른 분야처럼 보이지만 중세의 지식 체계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습니다. 별과 행성의 위치를 질병이나 치료 시기와 연결하는 사고방식이 존재했기 때문에 의학, 약초, 점성술을 결합한 일종의 종합 지식서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가설은 비밀 지식을 숨기기 위한 암호문이라는 주장입니다. 당시 특정 집단만 공유하던 의학이나 연금술, 철학적 지식을 보호하기 위해 독자적인 암호 체계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가설이 맞는다면 보이니치 문자는 실제 언어가 아니라 기존 언어를 다른 형태로 변환한 암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분석했는데도 단순하고 일관된 암호 규칙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반대쪽에서는 더욱 과감한 가설을 제시합니다. 애초에 아무 의미도 없는 책이었다는 것입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도 신비한 지식과 연금술, 비밀 문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의미 없는 문자를 복잡하게 만들어 신비로운 그림과 함께 책으로 제작하고 이를 귀중한 비밀 문서처럼 판매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 가설 역시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필사본의 분량이 상당하고 문자 배열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가짜 글을 수백 페이지 동안 만들면서 실제 언어처럼 보이는 규칙까지 유지했다면 그것 자체로 상당히 정교한 작업입니다. 또한 양피지는 당시 값싼 재료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이렇게 복잡한 책을 만든 이유가 단순한 장난이었다면 그 목적 역시 설명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실제 자연언어와 완전히 무작위적인 가짜 문자 사이에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한 규칙에 따라 의미가 거의 없는 문자열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냈다면 겉으로는 실제 언어처럼 보이는 통계적 특징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보이니치 필사본의 정체를 둘러싼 문제는 단순한 두 가지 선택지가 아닙니다. 실제 언어인가? 암호인가? 인공언어인가? 전문적인 약어 체계인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 의사문자인가? 여러 가능성이 서로 경쟁하고 있으며 어느 가설도 현재까지 필사본의 모든 특징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이니치 필사본의 미스터리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이 책은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현재 예일대학교 베이네키 희귀도서·필사본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디지털 이미지도 공개되어 있습니다. 즉, 세계 어디에 있는 연구자라도 내용을 살펴보며 새로운 가설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수백 년 전에는 소수의 학자만 볼 수 있었던 문서가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의 컴퓨터 화면에 공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읽지 못합니다. 어쩌면 해결책은 필사본 내부가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외부 자료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수도원이나 오래된 개인 문서 보관소에서 같은 문자를 사용한 짧은 편지가 발견될 수도 있습니다. 작성자의 이름이 기록된 장부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혹은 같은 내용이 라틴어와 보이니치 문자로 함께 기록된 자료가 발견된다면 상황은 극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보이니치 필사본의 로제타석'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런 자료가 영원히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 책은 앞으로 수백 년 동안 계속 읽히지 않는 문서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책은 남았지만 읽는 방법은 사라졌다

보이니치 필사본에는 거대한 황금 보물도 없고 잃어버린 도시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오래된 양피지 위에 정체불명의 글과 그림이 존재한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책이 눈앞에 존재하는데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세계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고 인공지능을 이용해 여러 언어를 빠르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수천 년 전에 사용된 고대 문자 가운데 상당수도 오랜 연구를 통해 해독했습니다. 하지만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보이니치 필사본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내용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평범할지도 모릅니다. "이 약초를 물에 끓여 마셔라." "이 시기에 씨앗을 심어라." "이 별자리가 나타날 때 특정 치료를 시행하라." 이런 중세의 생활 지식이 기록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언어나 지식 체계가 담겨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문서라는 사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미스터리가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질문이 시작됩니다. 누가 왜 수많은 양피지와 시간을 사용해 이렇게 정교한 가짜 언어를 만들었을까요?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사기였을까요? 특정 집단의 놀이였을까요? 혹은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기록한 것일까요? 그래서 보이니치 필사본의 진짜 매력은 '정답이 아직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의 가설이 등장하면 그 가설로 설명되지 않는 또 다른 특징이 나타납니다. 언어라고 생각하면 이상한 반복이 보이고, 가짜라고 생각하면 지나치게 정교한 구조가 나타납니다. 암호라고 생각하면 해독의 열쇠가 보이지 않고 전문적인 지식서라고 생각하면 그림의 정체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보이니치 필사본은 우리에게 문자와 언어가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가라는 더 큰 질문도 던집니다. 우리가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글자의 모양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글자가 어떤 소리를 나타내는지 알고, 단어의 의미와 문법을 이해하며, 그 문장이 만들어진 문화적 배경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모든 지식이 사라지고 한글로 적힌 책 한 권만 수백 년 뒤에 발견된다면 미래의 사람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을 수 있습니다. 문자는 남았지만 언어가 사라지고, 언어는 남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문화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이니치 필사본은 단순한 미스터리 문서가 아닙니다. 기록을 남기는 것과 기록의 의미를 보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보이니치 필사본이 해독된다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책의 내용만이 아닐 것입니다. 누가 이 책을 만들었는지, 어떤 시대와 문화 속에서 만들어졌는지, 왜 독특한 문자를 사용했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중세 지식의 한 조각까지 함께 발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영원히 해독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작성자가 사용한 규칙과 언어를 설명해 줄 모든 자료가 이미 사라졌다면 아무리 뛰어난 컴퓨터가 등장해도 하나의 정답을 증명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이니치 필사본은 거의 60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건너온 지금도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읽을 수 있는가?" 책은 살아남았습니다. 문자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림도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만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보이니치 필사본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매혹적인 미해독 문서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고합니다.